시칠리아 (Sicily)
시칠리아(Sicilia)는 이탈리아 장화 코끝에 놓인 지중해 최대의 섬이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극적인 변신을 이룬 와인 산지다. 20세기 내내 벌크 와인과 주정강화 마르살라의 공급지로 취급받다가, 2000년대 이후 “유럽에서 가장 흥미로운 산지” 리스트의 단골이 됐다. 변신의 중심에는 활화산 에트나가 있다.
에트나 — 화산 위의 부르고뉴
유럽 최대 활화산 에트나의 검은 비탈, 해발 500~1,100m에는 수백 년 된 포도밭들이 계단식으로 붙어 있다. 화산재 토양과 고도가 만드는 서늘함 속에서 토착 품종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가 자라는데, 그 와인이 놀랍게도 피노 누아를 닮았다 — 옅은 색, 붉은 과일과 훈연 미네랄, 팽팽한 산도. 평단이 “지중해의 부르고뉴”라는 별명을 붙이며 세계의 양조가들이 에트나로 몰려들었고, 콘트라다(밭 구획) 단위 와인까지 등장하며 부르고뉴식 테루아 게임이 화산 위에서 재현되고 있다. 용암이 언제 덮칠지 모르는 밭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긴장감은 덤이다.
네로 다볼라와 화이트 군단
섬 전역의 대표 레드는 네로 다볼라(Nero d’Avola)다. 잘 익은 검은 과일과 부드러운 타닌의 “시칠리아식 국민 레드”로, 1~2만 원대 가성비 구간의 강자다. 남동부 절벽 지대의 체라수올로 디 비토리아는 시칠리아 유일의 DOCG로 네로 다볼라에 프라파토를 섞은 유쾌한 스타일. 화이트는 그릴로, 카타라토, 인촐리아 같은 토착 품종이 지중해 해산물 요리의 파트너로 재발견되는 중이며, 서쪽 끝 마르살라(Marsala)는 한때 넬슨 제독의 함대가 실어 나르던 유서 깊은 주정강화 와인의 고향이다.
여담
시칠리아는 그리스, 로마, 아랍, 노르만이 차례로 지배한 문명의 교차로다. 포도 재배 역사만 2,700년 — 이탈리아 반도보다 오래됐다.
에트나 레드와 참치 요리의 조합은 현지 국룰이다. 시칠리아는 참치잡이의 성지이기도 해서, “레드 와인+생선”이라는 금기를 깨는 페어링이 일상이다. 한국식으로는 참치회, 훈제연어와 시도해볼 만하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유기농 포도밭 면적 1위다. 건조한 바람 덕분에 농약 없이 재배가 쉬운 천혜의 조건이다.
영화 「대부」의 고향답게 코를레오네 마을 근처에도 포도밭이 있다. 마피아 몰수 토지에서 협동조합이 와인을 만드는 “합법의 맛” 프로젝트(리베라 테라)도 실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