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Burgundy)

부르고뉴(Bourgogne)프랑스 동부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와인 산지로, 보르도와 함께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그런데 두 지역의 철학은 정반대다. 보르도가 여러 품종을 섞어 완성도를 만드는 “블렌딩의 땅”이라면, 부르고뉴는 단 두 품종 — 레드는 피노 누아, 화이트는 샤르도네 — 만으로 승부하는 “순수주의의 땅”이다. 섞을 게 없으니 남는 변수는 하나, 땅이다. 그래서 부르고뉴는 와인 용어 “테루아(terroir)”의 성지가 됐다.

밭 한 뼘이 등급을 가른다
부르고뉴의 등급 체계는 샤토(생산자)가 아니라 밭(포도밭 구획)에 매겨진다. 아래에서부터 레지오날(Régionale) → 빌라주(Village) → 프르미에 크뤼(1er Cru) → 그랑 크뤼(Grand Cru) 순으로 올라가는 피라미드 구조인데, 그랑 크뤼는 전체 생산량의 1%대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건 등급이 다른 밭들이 말 그대로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는 점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도 담장 이쪽 포도는 그랑 크뤼, 저쪽은 빌라주급이 된다. 수백 년의 시음 데이터가 “이 구획의 땅이 다르다”고 결론 내린 결과이며, 이 집요한 구획 나누기가 부르고뉴를 세계에서 가장 공부할 게 많은 산지로 만들었다.

코트 도르 — 황금의 언덕
부르고뉴의 심장은 “황금의 언덕”이라 불리는 코트 도르(Côte d’Or)다. 북쪽 절반인 코트 드 뉘(Côte de Nuits)는 피노 누아의 성지로, 즈브레 샹베르탱, 샹볼 뮈지니, 본 로마네 같은 전설적인 마을들이 줄지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유명한 로마네 콩티(Romanée-Conti)의 밭도 본 로마네 마을에 있는데, 축구장 두 개 남짓한 1.8헥타르 밭에서 나오는 와인이 병당 수천만 원에 거래된다. 남쪽 절반인 코트 드 본(Côte de Beaune)은 화이트의 영역이다. 뫼르소, 퓔리니 몽라셰, 샤사뉴 몽라셰 마을이 만드는 샤르도네는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이라는 수식어를 수백 년째 독점 중이다.

샤블리와 그 밖의 지역
부르고뉴 최북단에 뚝 떨어져 있는 샤블리(Chablis)는 같은 샤르도네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만든다. 서늘한 기후와 굴 화석이 섞인 석회질 토양(키메리지앙) 덕분에 오크 향 대신 부싯돌과 굴 껍데기를 연상시키는 미네랄이 지배하는, 칼처럼 날카로운 화이트가 나온다. 굴에 샤블리 조합이 유명한 게 우연이 아닌 셈이다 — 포도가 자란 땅 자체가 옛날 굴 밭이었다. 남쪽의 마코네(Mâconnais)는 좀 더 부드럽고 합리적인 가격의 샤르도네를, 코트 샬로네즈(Côte Chalonnaise)는 가성비 좋은 피노 누아와 화이트를 만든다. 부르고뉴 입문 가격대는 보통 이 두 지역에서 시작된다.

왜 이렇게 비싸졌나
부르고뉴 와인 가격은 지난 20년간 무섭게 올랐다. 이유는 단순한 수요-공급이다. 전체 면적이 보르도의 5분의 1 수준으로 작은데, 상속 때마다 밭이 자식들에게 쪼개지는 나폴레옹 상속법 전통 때문에 생산자당 물량이 극히 적다. 한 생산자가 그랑 크뤼 밭을 몇 이랑만 소유한 경우도 흔하다. 여기에 전 세계 수요가 폭발하면서 유명 도멘의 와인은 배정(알로케이션)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지경이 됐다. 다행히 부르고뉴(Bourgogne) 레지오날급이나 마코네, 샬로네즈에서는 아직 3~5만 원대로 부르고뉴의 문법을 경험할 수 있다.

여담

부르고뉴에서는 생산자를 “샤토”가 아니라 “도멘(Domaine)”이라 부른다. 성 같은 대저택 대신 농가 규모의 가족 경영이 기본이라, 라벨에 적힌 이름이 곧 농부의 이름인 경우가 많다.
포도밭을 뜻하는 “클리마(Climat)”라는 부르고뉴 고유 개념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밭 구획 자체가 문화유산이 된 세계 유일의 사례다.
레드 부르고뉴는 소고기 부르기뇽(뵈프 부르기뇽), 코코뱅 같은 이 지역 전통 요리와 궁합이 검증돼 있다. 한국식으로는 갈비찜, 버섯전골과 잘 맞는다. 화이트 부르고뉴는 버터구이 전복, 로스트 치킨과 클래식 조합이다.
매년 11월 셋째 주말에 열리는 본(Beaune) 자선 경매는 1443년부터 이어져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경매다. 이 경매 낙찰가가 그해 부르고뉴 시세의 바로미터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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