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용(Semillon)
세미용(Sémillon)은 화이트 품종계의 명조연이다. 단독 주연으로 나서는 일은 드물지만, 이 품종이 빠지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위트 와인이 존재할 수 없다. 소테른(Sauternes)의 귀부 와인, 그 주인공이 바로 세미용이다.
곰팡이가 만드는 기적의 주역
세미용은 껍질이 얇아 귀부병(보트리티스) 곰팡이가 잘 침투한다. 다른 품종이라면 재앙일 이 특성이 소테른에서는 축복이 된다. 곰팡이가 수분을 빼앗아 당분과 향이 농축된 쪼그라든 포도알로 만드는 꿀·살구·마멀레이드 향의 디저트 와인 — 샤토 디켐(Château d’Yquem)으로 대표되는 세계 최고가 스위트 와인이 이렇게 태어난다. 곰팡이 슨 포도가 병당 수백만 원이 되는, 와인 세계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이다.
드라이 세미용의 재발견
드라이 스타일에서는 보르도에서 소비뇽 블랑과 블렌딩되어 화이트 보르도의 살집과 질감을 담당한다. 그리고 호주 헌터 밸리(Hunter Valley)에는 독특한 명물이 있다 — 어릴 땐 밋밋한 레몬 물 같다가 10~20년 숙성하면 토스트·꿀·라놀린 향의 복합적인 와인으로 변신하는 헌터 세미용이다. 낮은 도수(10~11%)로 이런 숙성력을 내는 건 와인계의 미스터리로 통한다.
여담
소테른과 푸아그라는 프랑스 미식의 전설적인 조합이다. 좀 더 일상적으로는 블루치즈와의 궁합이 뛰어나다. 꿀 같은 단맛과 치즈의 짭짤한 펀치가 만나는 단짠의 원조 격 페어링이다.
이름의 유래는 보르도 근교 생테밀리옹(Saint-Émilion) 마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정작 지금 생테밀리옹은 레드 와인 산지로 유명하니 아이러니다.
귀부 와인은 포도알을 곰팡이 상태를 보며 한 알씩 골라 따야 해서, 한 그루에서 와인 한 잔 분량밖에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가격이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