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렌보스 (Stellenbosch)

스텔렌보스(Stellenbosch)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동쪽, 화강암 산맥에 둘러싸인 남아공 와인의 수도다. 1679년 시작된 350년 역사의 산지로, 유럽의 전통과 신대륙의 자유가 케이프 특유의 풍광 속에 섞여 있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의 제3지대”라는 표현이 이곳만큼 잘 어울리는 산지는 없다.

두 대양 사이의 테루아
스텔렌보스는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케이프 반도 안쪽에 있다. 남극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벵겔라 해류가 여름 오후마다 “케이프 닥터”라 불리는 서늘한 남동풍을 밀어 올려,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서도 포도가 신선함을 지킨다. 화강암과 사암이 섞인 오래된 토양, 산맥이 만드는 다양한 경사면 덕분에 한 지역 안에서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슈냉 블랑, 소비뇽 블랑까지 폭넓게 소화한다. 주력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보르도 블렌드 — 삼나무블랙커런트에 남아공 특유의 야성적인 흙내음이 감도는 스타일이다.

피노타주 — 남아공의 발명품
남아공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자체 품종이 있다. 1925년 스텔렌보스 대학에서 피노 누아와 생소(에르미타주라 불리던)를 교배해 만든 피노타주(Pinotage)다. 자두와 훈연, 때로는 커피 향까지 감도는 개성파 레드로, 호불호가 갈리지만 “남아공다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잘 만든 피노타주는 바비큐(남아공식 브라이)와 만났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화이트 쪽에서는 올드 바인 슈냉 블랑이 세계 소믈리에들의 가성비 최애 카드로 꼽힌다.

여담

스텔렌보스는 대학 도시다. 스텔렌보스 대학의 양조학과가 산지 전체의 두뇌 역할을 하며, 마을은 케이프 더치 양식의 흰 박공 건물들로 박물관 같은 풍경을 이룬다.
남아공식 숯불 바비큐 “브라이(braai)”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국민 의식이다. 피노타주 또는 시라와의 조합이 국룰 — 한국식 숯불구이 문화와 정서적으로 통하는 지점이 많다.
케이프 와인 산지는 세계에서 가장 생물다양성이 높은 식물 왕국(케이프 플로럴 킹덤, 유네스코 자연유산) 안에 있다. 포도밭 사이로 야생 프로테아 꽃이 피는 산지다.
1994년 민주화 이전까지 국제 제재로 수출길이 막혀 있던 탓에, 남아공 와인의 세계 시장 역사는 실질적으로 30년밖에 안 됐다. “350년 전통의 신인”이라는 역설적 위치가 지금의 역동성을 만든다.